2026. 01. 10. (토)
부스 위치 : 본3) 흰나비가 나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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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확정 1 ] 예최능 (NCP) 과거날조 <가족家族>
A5 떡제본 / 총편집 88p / 10,000원
* 예최능, 셋이서 처음 만나서 친해지고 가좍이 되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과거날조하고 싶다!
샘플 - 약간 수정 & 분량 추가
예현에게 있어 집은 심해와 다름이 없었다. 어둡고, 차갑고, 혼자인. TV나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에서와 같은 ‘따뜻한 가정’은 요원하기만 했다. 영원히 인정받을 수도 없고,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리라는 체념과 때때로 울컥울컥 치솟는 까닭 모를 울분. 변덕에 기대어 매달리는 가느다란 희망이 한데 모여 가라앉는다. 언젠가 그 캄캄한 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다 끝마칠 수 있으면 좋겠지.
부친은 앞으로 닷새 후에나 돌아오고, 지난달에 채워놓고 간 현금은 아직 반이 남았으며, 그는 제 졸업과 입학에 대해선 까맣게 모른다. 예현은 불이 켜지지 않은 거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일은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
고등학생이 되어 이전보다 나은 점을 꼽으라면, 예현은 단연코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된다는 것을 골랐다. 중학생 때는 들어가기 싫은 집임에도 거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고, 혹여 마음이 견디지 못하고 산책하며 귀가를 미적미적 늦추는 날에는 까닭 모를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차피 비어 있기 일쑤인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저 외의 누군가가 있던 흔적만이라도 남으면 감지덕지하는 구차함이 싫었다. 구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포기 못 하는 저 자신은 더더욱 그랬다. 기대는 늘 실망으로 모퉁이가 깎였으나 영영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예현은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구식 제도를 누구보다 반길 수밖엔 없었다. 누구는 저녁 식대도 내야하고 버스 타기에 피곤하면 택시비 들지 않느냐고 투덜댔지만, 그의 피붙이는 제게 냉담한 것에 비해 물질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채워줬으므로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
3교시가 막 끝난 후, 교무실에서 당혹스런 목소리가 났다.
“너는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하니.”
“안되나요. 친부모님 기일인데. 동생도 곧 하교해요.”
신 선생은 목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어조는 공손한데 내용은 아주 짝짝이다. 최윤. 담임을 맡은 학생 중에 대기업 양자가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쫄았지만, 실상을 까보니 말썽도 안 부리고 얌전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이런 폭탄을 던지다니. 보통은 그냥 깔끔하게 공결 처리를 하지 않나. 양부모가 알면 안 좋을 거라 이러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 흘끔 본 시계는 다음 수업 시작 7분 전이다. 이를 어쩌나 하는데 옆에서 학생주임이 구조선을 내왔다.
“그냥 보내줘. 조퇴니까. 그리고 최윤 학생. 갑자기 생긴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외 집안 경조사는 웬만해선 하루 전에는 알려줘. 이런 건 갑자기 들으면 당황스럽다.”
“네, 알겠습니다.”
목적이었던 조퇴증을 받은 최윤은 무심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담임선생님이 겨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윤. 학기 초에 뇌 CT 사진과 함께 특이 사항을 스스로 신고해 왔던 학생.
“고기능 소시오패스라니, 쟤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학생 대하듯 하면 될걸. 쟤는 그것치고 예의범절은 괜찮잖아. 중학교에서도 큰 말썽은 안 부렸다는 모양이고. 말대꾸야 따박따박 해대는데 말귀도 그만큼 잘 알아듣는다니까. 아마 친부모님이 잘 키워서 저 정도인가 보지.”
“그건 그렇죠. 근데 보고 있으면 조금 무섭단 말이에요.”
신 선생의 우는 소리에 박 학주가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떼잉. 학생한테 겁먹는 선생이 어디가 있어, 응? 게다가 거, 뭐냐, 소시오패스인지 뭔지는 영화 같은 걸 보면 범죄자로 나오더만, 최윤 저 녀석은 제 동생은 예뻐라 하는 것 같으니까 뉴스에서 볼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러면 됐지, 뭐.”
“그것도 그래요. 친동생이 다섯 살 어리댔죠?”
“그래. 저것도 나름 맘고생 좀 했을 거야. 부모가 사고로 돌아가셨잖아. 친인척 없이 갑자기 남매만 남아봐라. 운이 좋은 편이지, 쟤는.”
“아, 수업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공통과학 교과서를 챙긴 신 선생이 부랴부랴 교무실을 나섰다. 얼마 안 있어 4교시를 알리는 시종이 울렸다.
*
지금은 4교시. 봄답게 화사한 날씨에 종 치면 급식 먹을 생각이 만만한 고등학생들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이해한다는 듯, 교사가 잠시 이야기를 딴 데로 돌렸다. 별 관심이 없는 잡담이라 예현은 창밖이나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어라.’
학생 하나가 가방을 맨 채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금은 수업 중일 텐데. 저도 모르게 시계를 확인했지만, 수업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조퇴라고 하기엔 아픈 걸음걸이도 아니다. 냉랭한 얼굴을 한, 눈 깜빡임이 유독 덜 한 느낌을 주는 그 남학생이 교문을 다 벗어날 때까지 예현은 어리둥절한 채로 있었다.
*
4교시가 체육인 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최윤은 생각했다. 대부분의 머저리들은 쓸데없는 소문을 떠드는 걸 좋아하니, 누가 조퇴하면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해서다. 그런 놈들은 앞에서 말하면 모를까, 꼭 뒤에서 헛소리하기 마련이고 그건 ‘관리’하기 귀찮다. 어쨌거나 오늘 얻은 수확은 따로 있다.
‘친부모 기일이라는 건 생각보다 잘 먹히는 카드군.’
중학교 3년 동안은 기일이 주말과 재량휴업에 걸려 학교를 뺀 적이 없었다. 규정집을 뒤져보면 직계 가족의 장례식은 빼주는 게 맞고, 기일은 좀 애매했지만, 친부모의 기일은 먹히지 않을까 했다. 공결이냐 조퇴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미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하니 등교하는 편이 좋을 거고, 저 역시 공결보단 조퇴 기록이 남는 게 나았다. 흠 잡힐 건덕지는 안 만드는 게 맞지.
마침 아미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12시 전에 끝난다고 했으니 4교시에 데리러 가면 될 테다. 허락을 못 받으리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담임은 평범하게 양심적이고 심약한 사람이라, 친부모 기일이라고 대고 밀어붙이면 먹힐 타입이다. 그 시간에 남아있을 박 학주가 먼저 선선히 보내줬다는 게 예상외였다. 그러니까 ‘친부모 기일’이라는 건 제가 짐작했던 것보다 파워가 센 화두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심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우물쭈물하게 만드는 거고. 어쨌든 얻을 건 얻었으니, 저들이 뭘 생각하든 알 바 아니다.
걸어서 20분이면 아미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나온다. 굳이 들어가지 않고 교문 밖에서 멍하니 서 있으려니, 얼마지 않아 종료 차임이 울리고 학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쪼끄만 애들이 삼삼오오 쏟아진다. 개중 유독 웃음소리가 높은 애 하나가 이쪽을 알아채고 폴짝 뛰었다.
“오빠아아아~.”
“어, 왔냐. 가자. 우선 점심부터 먹게. 뭐 먹을래.”
“떡볶이!”
“기각. 어제도 먹었잖아.”
“그건 라볶이! 지금은 치즈 떡볶이 먹고 싶엉!”
아미는 지금쯤 학교에 있어야 했을 친오빠가 마중 온 일에 놀라지 않았다. 그야, 얘도 오늘이 친부모 기일인 걸 안다. 어쩌면 저희가 지내는 기일이 ‘일반적인 기일’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슬픔이라곤 한 조각도 안 느껴지는 동생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친부모의 죽음을 이해하기에 당시 아미는 너무 어렸다. 겨우 여섯 살. 어렴풋한 기억뿐이니 슬퍼할 만한 추억이 많지 못하리라. 윤은 그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저와 달리 이 애는 오래도록 깊이 슬퍼하고 힘들어할 테니.
반면 당시 최윤은 지금의 아미보다 한 살 적은 열한 살이었다. 머리가 워낙 좋아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나, 그에 으레 수반해야 할 감성을 지니지 못한. 장례식에서 영문도 모르고, 다만 뭔가 영영 잃었다는 직감만으로 엉엉 울던 동생을 붙들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장의사가 조각조각 맞춰 수습한 부모의 시신 앞에서 처음으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얘를 울리면 어쩌느냐는. 죽은 사람이 이제 뭘 어쩌겠냐는 자기 반박이 곧장 이어졌지만.
그날 획득한 가치가 있다. 최윤에게는 늘 암묵적으로 약속해 만든 불확실한 사회적 합의보다 스스로 인지하고 증명되어 얻은 가치가 훨씬 중요했다. 그건 이해하기 쉬웠고 납득도 갔다. 내 것은 중요하다. 절대 명제에는 부모가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몇 개의 단어, 문장이 곁들여진다. ‘내’ 동생. 이제 이 애는 단순히 ‘내’ 동생을 넘어서서 ‘내’ 부모가 목숨을 바쳐 증명해 낸 가치가 되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던 엄마와 아빠가 바로 그 사라짐과 맞바꾼 가치. 약간의 빈 감각은 아마 상실감이라 부를 테지. 남들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겠지만서도. 그러니 유일하게 남은 ‘내’ 가족이 사라지는 건 틀림없이 이보다 더 괴로울 거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외부의 ‘내’ 것은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 동생이 생기고 겪은 일들이 증명한다. 앞으로도 분명 짜증 나는 일도 많이 생길 테지만, 그 정도야 여기 살아서 옆에 있다면 견딜 만했다.
게다가 아미는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다.
최씨 일가에 입양된 직후였을 거다. 친자식과 입양아. 장남은 예의 바르게 불편해했고, 장녀는 아미를 맘에 들어 했지만(이 점은 다행이었다) 저를 괴물 취급했고, 차남은 분명히 적대적이었다. 그걸 감지한 최윤은 곧잗 이들과 선을 그었지만, 동생은 순순히 새 가족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바보라고 생각했고 참 속없이 해맑다고 생각했다. ‘내’ 것이 아닌 이들을, 심지어 이쪽에 적대적인 사람까지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타인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거야. 최현영은 너 좋아하는 게 맞으니까 그럴 수 있다 쳐. 근데 최현석은 너 싫어해.”
“그치만 언젠간 좋아해 줄지도 모르잖아. 그리구 오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냐구 물어두 말이징. 오빠는 남들하곤 완전 다르지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믿는 사람인데.”
“그건 가족이니까 그런 거겠지.”
“엄마랑 아빠도 처음에는 남남 아니었엉?”
“…….”
말문이 막혔다. 엄마에게서 말문이 막힌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이 애는 정녕 제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친부모가 지키고자 한 가치는 이거라고 겨우 완전히 이해했다.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 그건 엄청난 거겠지. 그걸 제게 알려주고자 했을 거다.
그렇기에 최윤은 제가 동생에게 무른 구석이 있음을 인정한다. 짓궂게 괴롭히는 경우가 훨씬 많더라도 그랬다. 실제로 아미 본인도 인정한 바다. 오빠는 내가 울면서 부탁하면 진짜 안 되는 것 빼고는 결국 다 들어주잖앙. 아미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말은 그거랬다. 오빠는 남들하고는 다르다고, 그러니 엄마아빠와는 다른 방식으로 너를 아낄 거라고. 동생은 사회적 감정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친오빠의 애정을 믿었다. 형태가 다를지언정, 오빠는 틀림없이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아미의 칭얼거림을 받아주고 말았다. 행복한 얼굴로 치즈떡볶이를 먹는 동생에게 “이걸로 사흘째야. 앞으로 2주는 떡볶이는 구경도 못할 줄 알아.”하며 으름장을 놨다. 아미가 우는 소리를 냈지만, 사흘쯤 먹었으면 한동안은 다른 음식에 꽂힐 게 뻔하다. 다음엔 얘도 물러나겠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애는 아니니까.
보통은 무덤에 술을 올린다고 하지만 미성년자가 주류를 살 수 있을 리 없고, 부모 둘 다 주량은 있지만 술을 아주 즐기는 분들은 아니었던 기억이 있어서(어쩌면 애들 앞이라 삼갔을지도 모르지만) 남매는 그냥 각자가 좋아하는 음료를 들고 왔다. 덕분에 아메리카노와 망고주스라는 극과 극인 조합이 되었지만, 최윤의 기억 속에도 집에 있던 음료는 늘 짝이 안 맞았으니 이걸로 됐을 거다.
최윤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감은 동생의 둥그런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건 제 친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 있는 것은 태우고 남은 뼛가루지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통념적으로 기일과 무덤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고, 동생은 보통 사람이었다.
1주기. 뭣도 모르고 “엄마아빠 보고 싶엉.”하는 아미를 무작정 데리고 나와, 여기서 얘는 기억 못 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생은 펑펑 울었고, 또 좋아했다. 울면서 좋아하는 게 뭔지 여전히 가늠이 안 갔지만 내년에 또 오자고 손 내민 아미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고개를 든 동생은 저와 꽤 닮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가 운을 떼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윤은 입을 열었다.
“내가 열 살 때 일인데―,”
*
중간고사가 끝났다. 이 학교는 웬걸, 학년마다 상위 30명을 벽보로 붙여둔댄다. 누군가 고릿적 방식이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전교생을 붙여두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후론 기가 막혔는지 기가 죽었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윤은 저 소문이야말로 선생들의 통제방식이라고 판단했다. 유용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장치. 고전적이지만 효율적이긴 했다. 소위 우등생으로 불리는 집단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순위를 유지하는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니, 등수가 잘 나온 놈들은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것으로 알량한 자존심을 채울 것이고 안 나온 놈들은 그걸 연료로 삼을 테니까. 그러면 따로 뭘 안 해줘도 알아서 굴러가는 집단이 완성된다.
윤은 만점이었던 제 시험지를 떠올리며 벽보 앞 사람 무리를 일부러 지나쳤다. 만점인 걸 알면서도 왜 왔냐고. 성적과 순위에는 관심이 없지만, 다른 것에 관심이 가서다. 과연, 한 번에 시선이 꽂혔다. 쟤가 최윤이야? 그 만점자? 어디서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퍼져나가는 시기와 질투. 꽤 짜릿했다. 평소에 젠체하는 녀석들이 날것의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드러내는 반응이 워낙에 재밌고, 또 다양한 군상을 알기에도 좋은 재료가 되었다. 감정에 무딘 것은 양날의 검이야. 넌 표정은 잘 읽어서 분석할 수 있어도 해석을 못 할 확률이 높아. 모르는 건 인지할 수 없다는 거, 알지? 엄마가 제게 하던 말버릇이었다. 네 눈은 정확할 테지만 파악한 내용이 뭔지 모른다면 소용이 없다고. 너는 네 동생보다 감정의 이름에는 둔하지 않냐고. 그때는 네 살짜리보다 못하다는 말에 화를 냈었는데, 오래지 않아 인정하긴 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엄마도 계산속도는 제가 더 빠르다며 인정해 주지 않았던가. 물론 이후 계산기로 부려 먹힐 줄 알았으면 조금 멍청한 척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늦었더랬다.
어쨌든 긍정적 감정의 표본은 바로 근처에 있고, 부정적 감정의 샘플은 학교에 가득했다. 최씨 일가가 사실상 적진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데이터를 쌓아두는 것이 나중에 여러 가지를 방비하는 데에 유용하리라. 중학생 때보단 머리가 굵어졌으니 좀 더 다양한 반응이 나와줄까, 하며 벽보 대신으로 인파를 슬쩍 훑었다. 누구는 적의를 태우며 눈을 마주했고, 누구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패배감을 표했다. 그런데 딱 하나. 처음 보는 눈길이 있었다. 저와 눈이 맞았으나, 대응하는 감각이 없는 멀건 시선. 그런데도 절박한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다. 음陰의 감정인 건 틀림없는데, 제게 달라붙지 않은 미상의 감정. 빈 라벨을 머릿속 한구석에 휘갈긴 그는 그 애의 명찰을 확인했다. ‘이예현’. 일단 우리 반은 아니군. 곁눈질한 벽보를 보니 2등이다. 저와 1개 차이, 그것도 부분 점수에서 1점 깎인 모양이지. 저 정도면 자존심이 긁혀서 분노하는 게 보통일 텐데, 아예 처음 보는 감정이라. 흥미가 생겼다. 마침 오늘은 오후에 뭐가 있어서 학교가 빨리 끝난다고 했고, 아미도 2시에 끝나는 날이었다.
‘한 번 보여줘야지.’
동생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서 그렇지, 사람의 감정을 읽고 아는 건 저보다 훨씬 나았으므로 제가 처음 본 저것을 단박에 알아볼 거라고 확신했다. 이예현이 옆옆 반인 것도 확인했겠다, 윤은 오늘의 마지막 교시를 들으러 교실로 유유히 돌아갔다.
예현은 영문도 모르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채점했을 때, 부분 점수가 깎인 건 알았다. 변별력을 갖추려는 문제였다 보니 오독 유도가 있었다. 답지를 보고서야 제가 걸려들었다는 걸 알았고, 제 실수가 맞으니 이의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만점에서 1점 모자란 정도면 충분히 1등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벽보에 붙은 1등 자리를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최윤. 모르는 애였다. 만점. 저 애는 유도에도 속지 않고 똑바로 문제를 푼 모양이다.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문득 부친에게서 느끼던 벽을 감각했다. 저 애가 있는 한, 지금껏 놓쳐본 적이 없었던 1등은 요원할 거라는 예감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성적으로 이승현이 칭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반응을 꼬박꼬박 돌려준 거의 유일무이한 것이기도 했다. 성적표는 매번 부친의 책상에 올려두었고, 먼지가 쌓여만 가다가, 어느 날 잊어버렸을 무렵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그건 읽었다는 뜻이 아닌가. 칭찬을 듣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눈길은 주는 거잖아. 그런데 1등조차 아니게 되면 미움받나?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더 미움받을 수나 있나?
문득 주변에서 “최윤? 쟤야?”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쟤구나. 무표정한 애였다. 그리고 보면 2주 전인가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던 애였던 것 같다. 그냥 멍하게 바라보는데, 무미하던 눈동자에 뭔가 스치더니 제 명찰을 한 번 보고선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예현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 애의 시선에 경멸이나 미움은 섞여 있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부친 하나를 감당하기에도 충분히 버거웠으니, 타인의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예현은 당황했다. 그 최윤이 종례하기 무섭게 저를 낚아챘으니까. 얼굴을 마주한 건 벽보 앞에서가 처음인데, 늘 그랬다는 듯이 당당하게 “야, 같이 가자.”하며 찾아온 거다. 반 학생들도 그 뻔뻔함에 휘말렸다. 원래 문제 하나를 도무지 모르겠다며 학교 끝나면 알려달라고 했던 반 친구조차 엉겁결에 저를 놓아버렸으니까.
초면이니 당연하게도 대화는 없었다. 손목을 잡히긴 했어도 억지를 부려온 것치곤 우악스럽지 않아서 예현은 시험 삼아 말을 꺼냈다.
“나, 안 도망가.”
“그래?”
“…저기, 보통 그러면 손 놓지 않니?”
문득 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 아시나요?”하고 묻는 행인 A와 “네”하고 답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B. 지금 그 상황인가. 어이없다 못해 차라리 웃겼다. 이쯤 되니 돌아올 대꾸가 어떨지를 기대되기까지 한다. 얘는 대체 뭐라고 말할까, 하고.
“도망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서 놔줘? 너는 좀 비실비실하게 생기긴 했어도 달리기는 잘할 것같이 보이거든. 따라잡을 수는 있지 싶은데, 그건 귀찮아. 비효율적이야. 반박할 말 있으면 해보던가.”
그랬더니만, 최윤이라는 친구는 멀뚱한 표정으로 아예 예상을 뛰어넘는 말을 해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너, 속고만 살았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면전에다 이런 말을?”
아무래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말로 뱉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말이 또 가관이라, 예현은 숫제 헛웃음만 지었다. 뭐지, 분명 우리말로 대화하는데 말이 안 통해. 저건 오히려 내가 할 말 아닌가. 부친과 몇 마디 주고받을 때는 적어도 의사소통이 된다는 느낌이라도 있었지, 이건 그냥 맥락이 맞지를 않았다. 적의나 악의가 있었다면 일부러 골리느라 그런 줄 알 텐데,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말이 안 맞는 거람. 이 애도 일단 나랑 대화하려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예현은 전교 1등의 눈을 흘끔 쳐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저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눈초리는 아니다. 그냥 눈매가 사나워서 그렇지. 그렇다면 조금쯤은 말을 섞어봐도 되겠지. 일단은 뭐라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아이스 브레이킹도 되지 않을까.
“우리, 말이 헛도는 것 같은데, 서로 하나씩 묻고 답하는 건 어때?”
“―나름 합리적이네.”
이즈음에 와서야 예현은 최윤이라는 애가 거의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눈을 되게 안 깜빡거린다. 사이보그?”
절로 나온 질문에 농담을 붙여보았다. 저 무표정이 깨지고 피식 웃기라도 하면 성공이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비슷한 거긴 하지. 태어날 때부터 뇌에 문제가 있었으니까.”
“뭐?”
“고기능 소시오패스. 그런데 눈 깜빡임은 그냥 내 버릇이고.”
이게 무슨 말이야. 영화나 책에서나 보던 그 소시오패스? 갑자기 오만 상상이 다 들어서 말문이 막혀버린 예현은 입만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질문에 대답했으니 이제 자기 차례라며 윤이 운을 뗐다.
“그럼 내 차례지. 복도에서 나랑 눈 마주쳤을 때 그 표정, 뭐냐?”
“…무슨 표정?”
내가 그때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예현은 일순 숨이 턱 막혔다. 눈을 왜 그렇게 뜨냐. 어쭈, 지금 야렸냐. 웃어? 울어? 메아리처럼 떠오르는 폭력의 기억에 숨이 막혔으나, 눈앞의 애는 무뚝뚝한 표정일지언정 저를 해하려 들지는 않았으므로 스스로 북돋워 반문했다. 꽉 막혀 잠긴 목소리였으나, 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부가 설명을 해왔다.
“벽보로 걸린 성적 확인했을 때. 그 후에 나랑 눈 마주쳤잖아. 그런데 날 시기하거나 질투해서 본 건 아니었지. 충격받은 얼굴이긴 했는데, 그러면 보통 자기 자존심이 박살 나서 그러는 건데 너는 해당이 안 됐어. 그러니까 스스로한테 실망한 건 아니라는 거지. 아니다, 없진 않았는데, 그럼 뭐지? 어쨌든 내가 아는 인간의 표정 중에서는 ‘겁에 질린’이라는 게 제일 비슷했고.”
모 드라마에 나오는 탐정 역 캐릭터처럼 주구장창 뱉어지는 말이 점점 더 가속했다. 멈추게 하기에는 이 애의 분석은 꽤 정확했다. 충격도 받았고, 막연한 실망감에 스스로를 짓이기기도 했었다. 게다가 공포심. 그게 보였다고. 내가 그렇게 투명하게 드러내서―. 속을 발가벗겨지는 기분에 압도되어 아연하게 굳어있던 중, 이변이 일어났다.
“-근데 난 널 위협하거나 겁을 준 적 없지 않나? 내가 괴롭히려고 했으면 기억 못 할 리가―어, 최아ㅁ”
“오빠아아아아아! 사람 괴롭히는 거, 나쁜 거!!”
말하다 말고 교문 쪽을 돌아본 최윤과 최근 유행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 가방을 멘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아무래도 동생인 듯 했다. 여하튼 윤에게 ‘최아미’라고 불린 이 애는 무서운 속도로 운동장 절반을 주파해 그 속도 그대로 오빠에게 온몸을 부딪쳤다. 말릴 틈도 없었다. 허우대가 훤칠하니 탄탄하던 윤이 냅다 나동그라졌다. 그 와중에 예현은 목격했다. 윤이 그대로 넘어간 까닭은 제 동생이 땅바닥에 안 구르게 하려는 거였다. 몸이 넘어가는 중에 바닥에 깔리지 않을 팔로 동생을 감싸는 걸 똑똑히 보았다. 무표정으로 그러는 건 조금 코미디 한 장면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소시오패스라고 자기를 밝혔던 애가 제 동생은 예뻐라 하는 모습을 본 덕에 맥이 풀렸다.
그 사이 윤은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고, 그 옆에서 아미라는 애가 조잘조잘 말을 쏘아댔다.
“저 오빠 괴롭히고 있었엉?”
“아니. 일문일답 중이었는데. 그렇지?”
“어? 어어, 응. 내가 먼저 그러자 했어.”
“봐봐.”
남매가 대화(라고 쓰고 동생의 일방적인 타박이라 읽는다)하던 중 제게 화살이 돌아와서 예현은 엉겁결에 답했다. 제 대답을 들은 윤의 표정에 미묘한 만족감이 서린 것을 발견한 예현은 문득 이 녀석이 일부러 불편한 상황을 연출해서 제가 그런 말을 먼저 꺼내게 한 건가 하고 의심했다. 그런데 아미라는 애도 비슷한 걸 생각한 모양인지, 크고 둥근 눈을 들어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몇 초 뒤 오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무슨 질문?”
“쟤가 성적 확인하고 지었던 표정, 그거 뭐냐고. 처음 본 거라-아.”
“마음 힘든 사람한테 그러면 어떡행, 오빠!!”
윤이 대꾸하기가 무섭게 아미가 옆구리를 퍽 쳤다. 소리가 꽤 살벌했는데, 아픈 게 맞는지 아닌지는 표정이 바뀌지 않아서 모르겠다.
“힘들다니. 쟤 맞고 멍든 데는 있어도 지금 걷는 거 보니까 멀쩡하던―아, 최아미. 좀.”
“그러니까! 저 오빠는 죽고 싶어 할 만큼 힘들다는 뜻!”
“아, 그러니까 저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표정이라는 거지―는 또 왜 때려, 최아미.”
“생각은 할 수 있어도 말로 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거.”
“응!”
“…오냐. 알았다.”
이 모든 대화가 너무나도 꽁트 같아서, 아니, 꼭 그런 이유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냥 하릴없이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눈매가 달라서 그렇지 이렇게 나란히 두니 은근히 닮았다. 그게 또 괜히 웃음 나는 거다. 하하. 아예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는 건지 모르겠다. 예현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마음 가는 대로 말했다.
“있잖아, 시간 있으면 우리 집 놀러 올래?”
어차피 빈 집이다. 거기에 사람 좀 데려온다고 해서 벌은 받지 않겠지. 그리고 있으면 뭐 어때. 그냥 얘들은 내쫓기고, 내가 죽고. 그렇게 끝나지 않을까. 끝났으면 좋겠다. 반쯤 자포자기였을지도 모른다.
“…너, 이제 보니까 경계심이 없구나. 그러다 어디서 장기 털린다.”
“오빠, 고운 말! 그리구 친구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징! 근데, 음, 예현 오빠. 진짜루 집 가도 괜찮앙? 무리하는 거 아니면 좋겠는뎅.”
윤은 이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아, 드디어 표정이 바뀌었네.’), 아미는 제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예현은 빙그레 웃었다. 와, 진짜 희멀겋게 웃네. 윤의 말은 못 들은 셈 치고, 예현은 무릎을 굽혀 아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괜찮아. 우리 집, 비어 있기도 하고, 혼자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오히려 음, 아미 맞지. 아미는 괜찮아?”
“으음~. 응, 그러면 좋아. 오빠는 윤 오빠 친구니까!”
문득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 듯한 윤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이었다. 미묘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진 것 같지는 않아 그냥 미소 지어줬더니 눈이 비껴갔다. 그건 그렇고, 친구라. 차마 밝게 웃는 이 애한테 “윤하고는 오늘 처음 말 나눠봤는데”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예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위험을 느끼는 감각만 유독 자란 편인 제게 이토록 선선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덕분에 저녁은 순살 찜닭을 시켰다. 간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고, 이런 건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아니잖느냐고 웃으니, 남매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자주 놀러 오겠다고 했다. 빈말이라도 좋았다.
*
“야, 이예현, 밥 먹게 나와.”
빈말인 줄 알았는데. 예현은 뒷문에 떡하니 버티고 선 윤을 넋 나간 채로 쳐다보았다. 다른 학생들도 엇비슷했다.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싶은 느낌이다. 동시에 두어 명의 분위기가 확 나빠졌는데, 나름 전교권에서 노는 애였지 싶다.
“안 나오냐.”
“어, 어어. 갈게.”
예현은 처음에는 미적거렸다가, 윤의 독촉에 곧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왔다. 굳이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다. 쟤들 눈엔 전교 1, 2등이 친한 거로 보일 텐데, 이를 어쩌나. 그러거나 말거나 윤은 점심 외출증 챙겨놨으니(“왜 내 외출증을 네가 받아와?” “시간 아까워서.” “….”) 나가서 먹잔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체념하는 속도는 빨랐으므로, 예현은 그냥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하략)
(하략)
[ 신간 확정 2 ] 예최능힐(NPC) <그냥 밥 먹는 이야기>
* A5 중철 총 36페이지, 4,000원
* 현장판매만 합니다. 나름 넉넉하게 뽑을 예정
* 재고 소진시, 행사 참관객 한정 배송비 받지 않고 추가 출력하여 통판합니다(일반 통판자는 배송비 있음)
* 예최능(NPC, 가좍임)+힐 중심 한국인이 밥 챙겨먹는 이야기…라고 쓰고 있긴 한데, 밥 먹는 중의 이야기보단 밥 먹으러 모이는 중의 일상 우당탕탕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01_김장
늦가을이 됐다. 본부 건물에 있을 땐 공조가 워낙 잘 되어 있어 계절감을 모르지만, 정문을 나서면 알싸한 공기가 폐부를 들이 채운다. 사계절이 있는 땅에 세운 탓인지 코어 내부 환경은 여러 가지가 통제되긴 해도 이런 변화까지 막아 세우진 않았다. 두어도 마땅한 자연은 그대로 두는 점을 힐데는 꽤 좋아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느긋한 감상을 가질 여력이 없다.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오전 업무 중에 잠깐 마주친 조나단에게서 점심을 거절당하면서(리카르도 선배와 뭘 사들고 스카 보좌관을 보러 간댔다) 예현이 오늘 연차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구한 재료를 전달하러 과학부에 들렀더니만 이번엔 제 사수와 그 동생도 연차라는 거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스쳐 입이 바싹 말랐다. 덕택에 오후 내내 무슨 생각으로 지냈는지 기억이 없다.
예현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과학부 투톱인 윤 또한 연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미야 오빠들이 “너라도 쉴 수 있을 때는 쉬어둬”라고 말해둔 것도 있고 본인이 취미생활을 양껏 즐기는 데가 있어 종종 낸다지만, 저렇게 셋이 나란히 날짜를 맞춰서 연가를 낸다니? 그렇게 쉽게 쉴 수 있는 자리였으면 예현이 몇 번이고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하는 꼴은 안 봤을 거고, 열흘 넘게 사수 머리칼도 못 보는 일이 흔했을 리 없다. 연말에 연가 좀 쓰라고 재촉하는 기간도 아니고, 그렇다면 누가 아픈가? 설마 예현이?
이 시점에서 셋 중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해보면 좋았을 것을, 힐데베르트의 머릿속에선 이미 예현이 앓아누웠다는 게 기정사실이 됐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된다. 블랙 배저 총사령관이 아파서 자리보전한다는 소문이라도 돌아봐라, 좋지가 않다. 그걸 빌미로 재연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최윤이라면 예현 일에는 발 벗고 나서니 바로 일 다 접고 올 수 있는 사람이고, 아미 역시 그렇다. 예현이 아프다면 최씨 남매가 동시에 휴가를 냈어도 이상하지 않지.
저 홀로 비장하게 전전긍긍한 막내기수는 정각에 맞춰 퇴근하고, 과학부에 들러서는 내일 마감이던 샘플 의뢰를 하루만 늦춰달라 부탁하고선 규정 속도를 빠듯하게 지켜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힐데는 입을 떡 벌렸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와는 마당이 아예 딴 판이었다. 나름대로 구분을 위해(사수는 별 의미도 없는 짓을 한다고 혀를 찼는데) 놓아뒀던 울타리가 어디로 치워졌고, 오두막과 본관 사이를 가득 메운 파랗고 투명한 대형 비닐과 그 위에 차곡차곡 포개진 배추와 무가 눈어림으로 보아 백 단위로 쌓여 있었다. 야채로 된 산 뒤편으로 사수의 모습이 보였다. 감정 자체가 읽히지 않는 무표정에 까만 목폴라까지는 익숙한 모습이라 문득 안심했다가, 그의 손에 끼워진 빨간 고무장갑을 보고 ‘어라?’싶었던 힐데는 곧이어 바닥께로 시선을 내렸다가 딸꾹질을 했다.
검붉은 고무대야. 그 안에 뭔가 질척한 붉은 빛을 띤 곤죽.
힐데베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윤. 설마, 누굴 묻었어요…?”
“얼씨구. 얼굴 보자마자 한다는 게 인사가 아니라 대뜸? 아니, 근데 넌 내가 이렇게 허접하게 증거인멸 할 거라고 생각하냐? 진짜 누구 묻고 없앨 작정이었으면 좀 더 잘했지. 깔끔하게.”
“그건, 그것도 그렇네요…아니지, 그럼 그건 대체 뭔데요?!”
덤덤하게 말을 받아친 윤의 말에 힐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수의 대답보다 더 빨리, 명랑한 목소리가 집 쪽에서 들리나 싶더니 순식간에 근처까지 왔다. 아미였다.
“어, 힐데당! 안녕!”
“안녕하세요, 아미. 어, 그런데 예현은 괜찮아요? 두고 와도?”
“예현 오빠는 지금 김치통 꺼내오느라 정신없을걸?”
“네? 김치통이요? 아픈 게 아니고요?”
구김살 없이 밝게 인사하는 빛과 소금에게 대자의 안위를 물으니, 남매가 똑같은 표정을 하고선 침묵으로 말했다. 얘는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냐고. 윤에게는 내성이 있지만 아미에게는 그럴 수 없었던 힐데가 억울한 맘에 제 지레짐작을 다 털어놓았고, 돌아온 건 사수의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연락해서 확인할 생각은 안 했냐?”
“에잉, 너무 그러지 마. 힐데는 예현 오빠를 아끼니까 걱정한 거잖아, 그칭?”
“역시 아미밖에 없어요….”
아미는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윤의 말에 풀 죽은 힐데를 한 번 일별하고선 환하게 웃으며 친오빠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과연, 지금의 관계가 정립되기 이전에도 ‘사수가 괴롭히면 아미에게 말하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처럼 윤은 영 뚱한 얼굴로 밀려날 뿐, 딴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역시 빛과 소금. 힐데가 감격하고 있는데, 최씨 특제 공습이 뚝 떨어진다.
“히히, 일꾼 늘었당. 힐데도 같이 김장하자. 매운 거 잘 못 먹으니까, 많이는 말고 딱 두 통만 챙겨줄겡. 배추김치랑 동치미 하나씩.”
“네?”
“힐데 얘 양념 무칠 수 있나? 올해 고춧가루 매운데. 불닭 가지고 그런 반응이었으면 아무래도 못 할 것 같지. 안 그러냐, 예현.”
“하면 늘지 않을까? 매운 것도 먹다 보면 느는 법이고. 힐데, 여기요. 이따 수육도 먹고 가요.”
“어어?”
어느샌가 소리 없이 다가온 예현이 힐데에게 빨간 고무장갑을 건네며 해사하게 웃었다. 사수가 낀 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눈앞에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미와 예현, 그 뒤로 ‘얘들이 이러는데 내뺄 수 있냐?’라는 표정을 지은 윤이 있다. 힐데는 각오를 다졌다.
맵다던 고춧가루는 정말 매워서 힐데는 윤이 예상한 대로 몇 번을 엉엉 울었고(그 누구도 구제해 주진 않았다), 거대한 김치냉장고(“냉장고랑 김치냉장고는 대체 뭐가 달라요?” “김치냉장고가 김치냉장고지.” “김치를 넣는 냉장고?” “냉장고에도 김치는 넣을 수 있잖아요!”)는 꽉 찼으며,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았다는 수육은 끝내주게 맛있었다.
[ 배포 ] 친애의 식탁
* 릭 중심 폼폼즈(+동향 찬조출현)
* 조금은 덜 죽고 싶게 된 리카르도 소르디에 대하여